'언론은 역사다'…'언론인·사학자·민주화 운동가' 천관우와 안재홍
제천문화원·㈔민세 안재홍 기념사업회 첫 학술세미나 개최
- 손도언 기자
(제천=뉴스1) 손도언 기자 = "그는 언론인·사학자·민주화 운동가로 올곧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시대가 요구했던 언론인의 덕목과 자질을 두루 갖춘 인물 있었고, 권력과 절대 타협하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지난해 15회 민세상 학술연구 부분 수상자이자 한국 언론사 연구의 권위자인 정진석 한국외대학교 명예교수는 충북 제천 출신 후석(後石) 천관우(千寬宇·1925~1991) 선생을 이렇게 평가했다.
제천문화원과 경기 평택시 ㈔민세 안재홍 기념사업회는 지난 23일 제천시민회관 3층에서 '후석 천관우 선생 탄생 100주년·민세 안재홍 서거 60주년' 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제천에서 이 시대의 지성인이자 언론계의 대부인 두 인물을 다룬 학술 세미나는 이번이 처음이다.
황우갑 한경국립대 백두산연구센터장(교육학 박사)는 학술 세미나에서 '두 민족 지성의 대화, 안재홍과 천관우의 인연' 발제문을 통해 "천관우는 역사와 신문(언론)을 동일시했다"고 평가했다.
그가 언론인으로 글을 쓸 때나 역사가로 연구하고 집필할 때나 '언론은 역사였고, 역사는 언론'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관우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황 교수에 따르면 천관우는 1925년 음력 6월 2일(양력 8월 10일) 제천군(제천시) 금성면 북진리(충주댐 건설로 수몰)에서 출생했다. 4살에 제천군 청풍면 읍리(수몰)로 이사했다.
5살 때 조부 천인봉의 슬하에서 한문을 배웠고, 6세 청풍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3학년 때인 1934년 2월 17일 자 동아일보에는 '글씨 잘 쓰는 천관우 9세, 다섯살 때부터 독서 가능해'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때부터 천관우는 천재 소리를 들었다.
12살에 청주 공립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42년 3월에 졸업한 그는 1946년 9월 서울대 문리과대학 사학과에 진학했다.
이후 1951년 1월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대한통신 기자로 활동했다. 1954년 3월부터 서울대와 홍익대 강사를 지냈고, 6월에 한국일보 창간에 조사부 차장으로 들어갔다. 이때 그의 나이가 30살(1955년)이었는데,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56년 조선일보로 옮겨 논설위원을 지냈다. 이 시기에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창립에 발기인과 운영위원으로 참여해 신문윤리강령을 채택했다.
또 1958년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면서 '홍대용의 실학사상', '실학의 개념 시비'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1959년 9월에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1963년 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일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한국일보 상임고문,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독립기념관 건립 준비위원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다가 1991년 1월 15일 별세했다.
민세 안재홍은 조선 개국 500년을 맞이하는 1891년 11월 30일 경기도 진위군(현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에서 출생했다.
안재홍의 어려서 꿈은 역사학자였다. 그는 훗날 한 잡지사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자신의 꿈이 '조선의 사마천'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기자였던 천관우는 고대사와 실학을 연구하다가 일제 말기에 도피 중이던 안재홍을 만난다. 천관우는 안재홍에게 한국 고대사 등을 사사하고 실학 연구와 한국 고대사 연구를 크게 발전시켰다는 평가다.
윤종섭 제천문화원장은 "천관우 선생은 제천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며 "1980년 제천시로 승격할 당시 시민헌장을 썼는데, 현재 서부동 네거리 시민탑에 기록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역의 역사는 우리가 발굴해야 한다"며 "천관우 선생처럼 제천이 낳은 인물들을 계속 발굴해 알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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